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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 정호승 벽 / 정호승 나는 한때 벽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속에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 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 정호승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 中] 일부 - Derek Ryan - Made of Gold 2024. 2. 4.
2월의 시 - 이해인 2월의 시 - 이해인 ​하얀 눈을 천상의 시처럼 이고 섰는 겨울나무속에서 빛나는 당신 ​1월의 찬물로 세수를 하고 새벽마다 당신을 맞습니다 ​답답하고 목마를 때 깎아먹는 한 조각 무맛 같은 신선함 ​당신은 내게 잃었던 주지 못할 일상에 새 옷을 입혀준 고통과 근심 ​내가 만든 한숨과 눈물 속에도 당신은 조용한 노래로 숨어있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우리의 인사말 속에서도 당신은 하얀 치아를 들어내며 웃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또다시 당신을 맞는 기쁨 ​종종 나의 불신과 고집으로 당신에게 충실치 못했음을 용서하세요 ​새해엔 더욱 청정한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2024. 1. 30.
겨울 / 조병화 겨울 – 조병화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는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Celine Dion and Peabo Bryson - Beauty and the Beast 2024. 1. 22.
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2024.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