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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 정호승

by 이첨지님 2024. 2. 4.

 

 

/ 정호승

 

나는 한때 벽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속에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꽃이 될 뿐이다

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물 한잔에 빵 한 조각을 먹을 뿐이다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 정호승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 中] 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