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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

[스크랩]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外

by 이첨지님 2008. 11. 27.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外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인상깊게 읽은 독자라면 기억하겠지만, 19세기 중엽 러시아 지식인 사이에서 가장 유행한 외국어는 프랑스어였다. 슬라브주의자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엉터리 지식인들이 얄팍한 프랑스어 실력을 뽐내는 상황을 묘사하여 지적 허영에 들뜬 서구주의자들을 비난하곤 하였다.

멀쩡한 오렌지를 '어륀지'로 읽으려고 애쓰는 그런 풍자가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악령>에 수시로 등장한다. <악령>에서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 선생은 프랑스어를 적절히 끼워넣지 않으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그는 <작가 일기>에서 유행처럼 번진 프랑스어가 얼마나 해악적인 것인가를 이렇게 적은 바 있다. “두 살쯤 된 어린 아기를 돌보도록 프랑스인 가정부를 초대했을 경우 아이의 엄마는 얼마나 나쁜 독으로 그녀의 아이를 중독시키고 있는가를 알지 못한다.” 전형적인 슬라브주의자다운 비판이다. 톨스토이도 그와 같은 입장에서 대작 <전쟁과 평화>의 몇 대목에 불어를 뽐내는 신사계급을 심심찮게 등장시키곤 하였다.

실제로 많은 러시아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러시아 문학의 비조 푸시킨은 자신의 아내가 순수한 러시아 혈통에서 자란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사적인 편지를 불어로 썼다. 인민주의 작가 헤르첸도 '나의 과거와 사상'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러시아어로 된 까람진의 <러시아의 역사>를 읽었다는 얘기를 듣고 자기 아버지도 그 책을 읽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썼다. “이거 온통 외래어 투성이라 지겹기만 하군.” 이런 풍자들은 사실 19세기 중엽 러시아 대륙에 몰아닥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대립을 저마다의 입장에서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바실리 대성당

러시아의 역사는, 조금 과장하여 말한다면, 러시아 최초의 군주적 지배자인 9세기 경의 올레그부터, 1462년 강철 같은 영도력으로 짜르 체제를 구축한 이반 뇌제의 러시아제국 통합을 거쳐, 1698년 러시아의 서구화를 선언하고 성 페테르부르크를 ‘유럽으로 열린 창’으로 만들 것을 지시한 표트르 대제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약 1천 년에 이르는, 유럽을 향한 애정과 극복의 역사였다.

유럽을 향한 러시아의 애증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 한 측면은 세계 지도의 절반에 가까운 대륙의 소유국이지만 혹독한 추위와 형편없는 농지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랄산맥보다는 드네프르 강너머 유럽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상황에 의한 것이다.

이 열악한 경제 상황은 유럽을 침략과 정복의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 동시에 이와 반대되는 또 다른 측면이 엄존하는데, 이는 유럽이 단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실은 정치구조나 문화적 수준으로 볼 때 마땅히 고개 숙여 배워야 할 스승의 땅이란 점이다.

이같은 침략과 배움은 1천 년 러시아 역사의 항상적인 이중주였다. 이 절묘한 이중주를 그대로 표징하는 것이 바로 모스크바 크렘린 궁 옆에 서있는 바실리 성당의 돔형 지붕이다. 독특한 색채와 외장을 지닌 양파형의 9개 돔은 서구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열망이 일궈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유럽화는 근대적 교육체계와 문화적 교양 수준이 높아진 19세기 초에 들어와 더욱 활성화되었다. 교통과 통신을 발달로 유럽에 대한 갖가지 정보가 대량 소개되어 러시아는 유럽에 대해 보다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으며 그렇게 정보양이 많아질수록 러시아의 유럽화는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되었던 것이다.

이 '유럽화' 과정에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가 대립을 보였던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서 독일의 낭만적 민족주의 영향을 받은 귀족 출신 엘리트에 의하여 촉발된 슬라브주의는 러시아의 민족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러시아정교의 공동체 정신과 평화 사상이 서유럽의 계몽주의나 서구 가톨릭의 이성주의보다 우월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조시마 장로'는 그 어떤 신비주의적 기적을 남기지 않고 위엄 있는 인간적 존재로 평범하게 악취를 풍기며 죽어간다. 그 위엄있는 죽음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고결한 러시아성을 보는 것이다. 물신숭배에 빠져 타락한 생활을 거듭하는 아버지 표드르와 서유럽의 혁명 사상에 심취하였다가 결국 무신론과 허무주의에 경도된 이반, 이에 대립하여 숭고한 신앙의 자세로 일관하는 슬라브의 정신적 원형인 주인공 알료사, 이 세 인물의 성격을 한 몸에 가진 분열적 인간인 맏형 드미트리. 그리고 이 어두운 집안(곧 러시아)의 짙은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드는 불길한 사생아 스메리자코프 등은 러시아의 집단 초상화다.

러시아 음악가 차이코프스키

서구주의자들은 슬라브주의의 일정한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적 인식이나 계몽의 확산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관제 민족주의의 도구가 되고 극단적인 우경화로 치닫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우려는 19세기 중엽의 슬라브주의가 20세기 초엽에 오스트리아에서 촉발된 '범슬라브 정치운동'과 결합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공식으로 이 범슬라브주의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범슬라브족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격렬한 주장은 1차 대전이라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것이 레닌이 주도하는 볼세비키 혁명의 또 다른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국면 속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있다. 그는 1840년에 우랄 지방 보트킨스키에서 태어났다. 고급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언제나 어린 차이코프스키를 위압적인 어투와 명령으로 키웠으며 대신 어머니는 피아노를 가르쳐주는 등 항상 자애롭게 대했다. 1862년 그는 당대 일급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교육자인 안톤 루빈스타인이 설립한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게 된다. 그의 음악적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는 겨우 4년간 정식으로 배운 그가 1866년에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 선출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아래 영상은 앙드레 클뤼탕스의 지휘로 에밀 길레스가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초기 습작을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걸작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작곡한 1869년부터이다. 이때부터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작곡에 매달렸다. <백조의 호수>(1876년), <예프게니 오네긴>(1877년), <교향곡 4번>(1878년), <이탈리아 기상곡>(1890년) <피아노 협주곡 1번>(1884년), <교향곡 5번>(1888년), 발레 <호두까기 인형>(1892년). 이러한 작품을 통해 차이코프스키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으며 한스 폰 뷜로 등 서유럽 음악계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리고 <교향곡 6번>을 1893년에 작곡하였다. 이 해의 가을, 1893년의 오늘, 11월 6일에 차이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났다.

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 폰 메크 부인

차이코프스키는 19세기 중후반 음악계에서 혁신과 보수의 양편에 서있었다. 물론 이것은 정치사상의 측면이 아니라 음악 양식의 측면에서 본 것이다. 러시아 음악계 내부에서 그는 서유럽의 기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서구주의자였다. 당시 러시아 음악계는 이른바 ‘5인조’로 표현되는 슬라브주의가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무소르크스키, 발라케에프, 퀴, 보로딘 등의 5인조는 서구 음악어법에 반대하고 러시아 전통의 서정과 음악 유산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내세워 파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보기에 차이코프스키는 전통 어법 대신 서구의 어법을 긴급히 수혈하고자 하는 혁신파였다. 하지만 그 무렵 서유럽 음악계는 '전통', 곧 베토벤을 정점으로 하여 슈베르트와 브람스로 이어지는 둔중한 흐름이 조금씩 위축되고 리하르트 바그너를 중심으로 하는 대대적인 혁신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 좁혀 말한다면 바그너 쪽이 아니라 브람스 쪽이었다. 그래서 서유럽의 관점에서 그는 고전파에 속했다. 아래 영상은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피아노), 리오니드 코간(바이얼린), 나탈리 구트만(첼로)이 협연하는 피아노 삼중주곡 일명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1악장이다.


차이코프스키

러시아 음악 전통의 재창조를 선언한 러시아 5인조만이 진정한 민족주의자이고 서구 어법에 충실하려 했던 차이코프스키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차이코프스키는 틈만 있으면 유럽 여행에 나선 서구주의자였지만 그 내면에는 조국 러시아에 대한 한없는 애정으로 충만되어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아래 글은 1873년에 쾰른, 밀라노, 파리 등을 여행하고 나서 쓴 일기다.

“나는 지금 거대한 자연 한가운데 있고 이국 풍물이 인상적이지만, 러시아에 대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친다. 고향의 광활한 평원과 초원, 숲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마구 뛰어오른다. 오,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땅이 경련을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돌덩이의 괴물 같은 산악보다 그대 러시아는 수백 배 아름답고 우아하다.”


 


 


 



출처 : 하늘 땅 사람
글쓴이 : 아리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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